본문 바로가기 사이드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미디어센터

A multimedia mosaic of moments at GIST

People

정진홍 특훈교수, 중앙일보 "소프트파워" 기고 - <진천 사는 인자씨>

  • 이석호
  • 등록일 : 2013.05.13
  • 조회수 : 2115

진천 사는 인자씨

 

정진홍 특훈교수

 

 

  # 한 달에 한 번 정도 들르는 동네 머리방엔 자리가 한 자리뿐이라 예약을 하고 가도 기다리기 일쑤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곳에 갈 때마다 내 앞 순서에서 파마를 하는 입담 좋은 아주머니 한 분과 마주하곤 한다. 기다리며 그분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다. 이름하여 충북 진천 사는 인자씨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 서울 나들이를 한다. 아침부터 서둘러 진천시외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약 1시간40분을 달려 서울 남부터미널에 닿아 다시 지하철을 갈아타고 서래마을에 있는 고향친구의 작은 미용실을 찾는다. 남편이 “무슨 대단한 머리 한다고 서울까지 가느냐?”고 볼멘소리를 하면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머리는 (친구)소영이에게!”라고 단박에 응수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머리 한다는 핑계(?)삼아 고향친구 찾아서 서울 나들이를 하는 것이다.

 

  # 진천 사는 인자씨의 본래 고향은 강원도 인제다. 첩첩산중에 군부대가 많은 전방지역이라 예전에는 군입대를 해서 인제·원통 지역으로 배치되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지였지만 지금은 교통이 좋아져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1시간50분에서 2시간 남짓 걸린다. 충북 진천에서 서울 오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도 어린 시절 살며 뛰놀던,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오지 같던 옛 정취와 그 산등성이에 지천으로 깔렸던 포고지(본명 매발톱)를 그리워한다. 그런 그녀가 입을 열면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귀에 익은 구수하면서도 독특한 억양의 강원도 사투리가 여지없이 쏟아진다. 정말이지 영락없는 강원도 여자다.

 

  # 하지만 ‘살아 진천 죽어 용인(생거진천 사거용인 生居鎭川 死去龍仁)’이란 말 한마디에 끌려 진천에 조그만 땅을 사서 삶의 뿌리를 통째로 옮겨간 인자씨는 그곳에서 복닥거리며 아이 셋을 키우고 또 모두 억척스럽게 대학공부를 시킨 후 지금은 남편과 단둘이 산다. 1955년생으로 내일모레면 환갑인 인자씨는 큰딸이 서른여덟, 둘째딸이 서른다섯, 막내아들도 서른셋이다. 딸 둘은 모두 출가해 외손주만 다섯이다. 이제 아들이 장가만 가면 여한이 없을 것 같은 그녀에게도 말로 다 못하는 아픈 상처와 기억이 있다. 다름 아닌 남편의 외도였다. 아이 셋을 힘겹게 대학공부를 시켜 이미 진이 빠질 대로 빠진 상태였음에도 남편이 뒤늦게 대학공부를 하겠다고 해서 남편 기 살려주겠다며 힘들다는 불평 한마디 없이 뒷바라지했더니 그 잘난 남편이 대학 문턱 넘나들며 젊은 애와 어울려 엉뚱한 일을 저지른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 배신감과 배반감에 몸서리치다 결국엔 남편이 죽도록 미워져 이혼이 아니라 아예 남편을 버려버릴 생각까지 했지만 아이들 장래 생각해서, 또 그 인간이 불쌍해서 이리저리 쌓인 번민일랑 통 크게 털어내고 지금은 그냥 덤덤하게 살고 있다며 애써 웃는다.

 

  # 머리를 하고 나서 그녀는 고향친구와 밥 한 끼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남편 흉보고 자식 자랑하며 고향 생각에 젖는다. 한 달에 한 번 서울 나들이 하는 반나절 남짓한 그 시간이 그녀에겐 삶의 기운을 북돋는 ‘마음의 보약’인 듯싶다. 사실 그녀는 평일엔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식당일을 한다. 하지만 삶이 피곤하다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하는 일이라고 해야 조그만 회사 구내식당에서 직원용 식사를 혼자 도맡아 챙겨주는 일이지만 그녀는 남들이 보기엔 허드렛일처럼 보이는 그 일에 정성을 쏟는다. 그리고 매일 내놓는 밥과 반찬에 따뜻하고 건강한 행복 바이러스를 뿌려놓는다. 정말이지 그녀가 해주는 밥을 먹는 그 회사 사람들은 사장부터 말단직원까지 모두 무척이나 건강하고 행복할 것 같다. 행복은 큰돈 들여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복은 그리 멀리 있지도 않다. 진짜 행복은 소박한 일상에 깃든다. 더구나 그 행복은 아픔을 겪어본 사람만이 진짜 맛을 안다. 그런 점에서 진천 사는 인자씨는 그래도 참 행복한 사람이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2013년 5월 11일자)

콘텐츠담당 : 대외협력팀(T.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