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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섬, 유혹하는 숲
# 그제 오후 제주대학교 아라뮤즈홀에서는 산업부가 주최하고 한국산업기술진흥원과 제주의 소리가 주관한 ‘기술, 바람에 담다’라는 주제의 테크플러스(tech+) 행사가 열렸다. 테크놀러지(T), 이코노미(E), 컬처(C), 휴먼(H)의 앞머리 글자를 따고 여기에 무엇이든 뒤섞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플러스(+)를 더해 ‘테크플러스(tech+)’라고 명명된 신개념 지식융합콘서트였다. 필자도 ‘기술, 욕망을 탐하라-유혹의 기술’이란 주제로 한 대목 거들었다. “꿈꾸는 섬 제주는 유혹의 기술로 무장해야 한다”고!
# 본래 제주는 유혹하는 섬이다. ‘배비장전’을 각색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뮤지컬로 1966년 임영웅 연출, 최창권 음악, 임성남 안무로 막이 오른 ‘살짜기 옵서예’의 배경무대도 다름아닌 제주다. 지체 높고 점잖기를 뽐내던 배비장이 제주기생 애랑에게 유혹당하는 얘기를 해학미 넘치게 펼친 창작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는 당시 패티 킴이 애랑 역을 맡아 나흘간 7회 공연 만에 1만6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해 또 하나의 전설을 탄생시켰던 수작이다. 올 초 근 반세기 만에 리바이벌돼 한국적 유혹의 고전임을 새삼 입증했다.
# 제주에서 평화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아슴프레 안개 낀 숲길을 지나다 보니 길가의 작은 갤러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노리’라는 이름의 이 작은 갤러리에서는 정지용의 시 ‘향수’의 한 구절인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을 표제로 내건 화가 신수희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갤러리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근처 바닷가에서 가져온 모래 위에 이곳에서 자란 나뭇가지들을 원형으로 뿌리듯이 얹은 소박한 설치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정말이지 ‘흙에서 자란 내 마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싶었다. 전시실 안으로 좀 더 들어가 결코 많지 않은 작품들이지만 천천히 음미하듯 바라보던 중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이란 제목의 작품 앞에 섰다. 그 작품은 천상병 시인의 ‘강물’이란 시의 구절들을 캔버스 위에 흘려서 써 내리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 말 그대로 그림과 시가 하나된 작품이었다.
#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그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는 머리로 읽는 시가 아니다. 마땅히 몸으로 읽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천 시인의 시 ‘강물’을 읊조리고 있는 노리갤러리 주변은 닥나무 마을로 불리는 저지라는 곳이다. 대부분 곶자왈 지역으로 비가 내리면 물이 고이지 않고 거짓말처럼 땅으로 스며들어 죽죽 빠져나가는 지형이라 강은커녕 실개천도 구경 못 하지만 되려 덩굴과 나무가 우거져 기묘한 모습의 숲을 이룬 곳이다. 이 곶자왈 지형의 닥나무 마을 9만여 평에 걸쳐 예술인 마을이 형성돼 있고 그 근처에 ‘환상의 숲’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재미난 것은 족히 30만 평쯤 개발해야 하는 골프장은 늘 적자에 허덕이는데 정작 곶자왈 지형의 숲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숲의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풀어서 내놓는 1만여 평의 환상의 숲은 쏠쏠한 재미를 본다는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제주가 스토리텔링과 엮일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 제주는 바람과 돌과 여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제주의 적잖은 곳들이 실은 이런 곶자왈 지형의 숲이다. 바로 그 숲이 보물임을 알아야 한다. 정말이지 제주의 속살 같은 숲들은 그 자체가 거대한 유혹이다. 그 숲이 거대한 유혹의 숲임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는 제주의 신비에 다가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제주의 바람은 때로 두렵기까지 하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까닭은 그 바람이 꿈꾸는 섬 제주의 꿈을 실어 나르고 숲의 은밀한 속살을 슬쩍 드러내는 유혹하는 손짓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리라!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중앙일보 2013년 7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