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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동거하는 삶
# 기어코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을 때 순간적으로 반동하듯 스스로를 일으켰지만 이내 정신줄을 놓았던 것 같다. 깨어보니 넘어진 곳이 어디인지, 여기에 왜 있는지 생각의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눈에 들어온 근처 병원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곤 이내 더 큰 병원으로 이송돼 비로소 응급조치를 받고 컴퓨터단층촬영(CT) 등 각종 검사를 받은 후 꿰맬 곳을 꿰매고는 끝내 입원하고 말았다. 다행히 머리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넘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눈을 비켜서 옆얼굴에 난 상처는 아물기까지 아직도 여러 날이 필요할 듯싶다.
# 넘어질 때 다친 손등을 꿰맨 채 붕대 감은 손을 어렵게 놀려 이 글을 쓰지만 글을 쓴다는 이 사실만으로 스스로 살아있음을 존재증명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릇 살아있다는 것은 도처에 널린 죽음의 지뢰를 용케도 피해 가는 것인지 모른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보스턴마라톤 폭탄테러 사건을 병실의 텔레비전으로 지켜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때로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멀쩡한 삶’이 결코 아무 때나 또 누구에게나 모두 한결같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도 새삼 깨닫는다. 그만큼 우리네 인생은 삶과 죽음의 쉼 없는 교차점을 통과하고 있는 아슬아슬한 곡예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
# 다쳐서 상처 나고 아파 보면 삶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은 인지상정일 게다. 삶이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죽음의 지뢰를 피해 어렵게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니 어쩌면 삶이란 것이 삽시간에 피고 지는 벚꽃처럼 덧없게 느껴질 만큼 삶은 매 순간순간 위태롭다. 그처럼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삶의 한 귀퉁이에서 아프고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주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가족이다. 퇴원 후에 아내 손을 꼭 잡고 함께 벚꽃잎 휘날리는 거리를 지나 점심식사를 하러 가는 그 순간이 참 행복하다면 너무 감상적인가?
# 병실을 다녀간 지인으로부터 다음 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는 모 국회의원의 외아들이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전했다. 그리고 패닉 상태에 빠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지금 함께 있노라고 했다. 나는 그 국회의원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고 몇 차례 인사만 나눈 처지였지만 그래도 정말 마음이 아팠다. 하물며 그 부모 심경이야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몸의 상처야 아물면 된다지만 마음의 상처, 특히 자식의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 사람의 심장에 무덤 하나를 파놓은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겠나. 너무나 반듯하고 모범적이라 부모가 모두 바깥일을 하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는데 그만 그런 아이가 뛰어내렸다는 전언을 들으면서 또 한 번 삶이란 지뢰밭을 걷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삶은 죽음과 동거하는구나 싶었다.
# 한국 사회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이 가장 높다. OECD 국가 평균의 세 배가 넘는다. 청소년 자살률도 부동의 넘버 원이다. 심지어 75세 이상은 세 배가 아니라 8.3배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자살자의 정신병력이나 심리적 병인 때문만이라고 볼 수 없는 명백한 사회적 병리다. 노인 자살의 경우 물론 그 첫째 이유는 빈곤으로 추정된다. 빈곤은 고독으로 이어진다. 돈이 있으면 자녀들이 찾아오기라도 한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외면하고 마는 게 냉정한 우리네 현실이다. 청소년의 경우에도 왕따와 과도한 입시부담 때문만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회 공동체의 질에 분명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삶과 사회 곳곳이 지뢰밭이다. 한 발 한 발 내딛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다. 정말이지 어디서 터질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도 생사의 교차점일지 모른다. 그러니 어찌 대충대충 삶을 함부로 살겠는가. 제대로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물론 그 일이 참 쉽지 않지만!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