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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7년 2월17일자 이종민 고등광기술연구소장님의 과학칼럼 원문입니다.
[과학칼럼] 나노가 만드는 아름다운 빛깔
이종민 광주과학기술원 고등광기술연구소장 겸 신소재공학과 교수
반짝 추위가 있었지만 입춘이 지나서인지 이내 사그라든다. 벌써 섬진강변 어느 마을에선가는 매화꽃 봉오리가 터질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들은 제각각 아름다운 빛깔을 뽐낸다. 고창 선운사 뒤편에 병풍같이 늘어선 동백꽃이 유명한 이유도 아마 그 붉은색 때문일 것이다. 동백꽃은 왜 하필 붉은색일까. 동백꽃잎에는 햇빛 중에서 빨간빛만 반사하고 다른 색의 빛은 모두 흡수해 버리는 색소(色素)가 있기 때문이다. 햇빛은 아무 색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여러 색의 빛들이 혼합돼 있다. 비가 갤 때나 폭포 앞에서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이 보이는 것은 바로 햇빛에 있는 각종 색깔이 물방울에 의해 분리되기 때문이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이나 나비의 다양한 빛깔도 색소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공작의 깃털이나 나비의 날개에는 색소가 없다. 그러면 색소 없이 어떻게 그 다양한 색을 내는 것일까. 남미의 정글에 산다는 파란색으로 유명한 "몰포" 나비의 예를 들어 보자. 머리카락보다 십만 배나 작은 나노미터(nm.10억분의 1m) 크기의 구조를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으로 몰포 나비의 날개를 확대해서 보면 날개에는 기와지붕처럼 규칙적으로 층층이 쌓인 나노 구조물이 있다. 이 규칙적인 나노 구조물은 햇빛 중에서 파란빛만 반사하고 다른 색의 빛들은 모두 통과시킨다. 다시 말해 나노 구조가 색깔을 내는 것이다. 규칙적인 구조물을 학술적으로는 결정(結晶)이라고 한다. 그래서 특정한 빛만을 반사하는 규칙적인 나노 구조물을 광결정(光結晶)이라고 부른다. 색소가 내는 색깔은 색소분자와 햇빛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색소의 크기나 모양에 관계가 없다. 하지만 나노 광결정의 경우에는 그 규칙적인 배열이 달라지면 내는 색깔도 달라진다. 공작의 화려한 깃털도 다양한 광결정들의 배열에 의한 것이다. 중국 후단대학의 지안 지 교수는 2003년 미국국립학술회보(PNAS) 10월호에 다양한 광결정들이 있는 공작의 깃털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해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공작이나 나비 외에도 색소 없이 광결정으로 색깔을 내는 생물에는 딱정벌레나 양치식물 등이 있다.
이러한 생물들은 왜 날개나 표면에 광결정 같은 정교한 나노 구조물을 갖고 있을까. 아직까지 생물학적으로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단지 생존과 종족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물학자들은 추측할 뿐이다. 광결정 구조의 나비날개를 움직이면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깔이 나타난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짝짓기 상대에게 쉽게 알리거나 유혹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번식률을 높인다. 한편 광결정 구조는 특정한 빛을 반사하는 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정한 빛을 모아 주는 기능도 있다. 바다에 사는 불가사리는 위에서 오는 빛을 모아 몸 안에 있는 빛 수용체로 전달하는 렌즈 역할의 광결정 구조를 표면에 갖고 있다. 이 광결정 렌즈가 빛에 대한 민감도를 높여 천적의 존재를 금방 알아차리게 해 생존 확률을 높여 준다.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근무하는 포티라일로 박사는 이번 달 발간된 네이처 포토닉스에 몰포 나비 날개의 광결정 구조가 파란빛을 반사하는 기능 외에 수증기 속의 특정 가스 물질을 구별하는 기능도 갖고 있음을 발표했다. 광결정 나노 구조물이 아름다운 빛깔을 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기능도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곧 봄이 오면 꽃들이 피고 나비들이 날아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꽃잎과 나비날개의 색깔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곤 손으로 나비의 날개와 꽃잎을 문질러 보라. 꽃잎에서는 그 빛깔의 색소분자가 포함된 색이 묻어나지만, 나비날개에서는 광결정 나노 구조물이 파괴돼 본래의 빛깔이 사라진 무색의 가루만이 묻어날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빛깔은 참으로 오묘하다. 올 봄에는 자연의 아름다운 빛깔을 몸소 체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