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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 특훈교수, 중앙일보 "소프트파워" 기고 - <고유섭과 개성 4인방>

  • 이석호
  • 등록일 : 2013.05.27
  • 조회수 : 1618

 

고유섭과 개성 4인방

 

정진홍 특훈교수

 

 

  # 지금부터 80년 전 스물아홉 살의 청년이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에 취임했다. 그의 이름은 고유섭(高裕燮, 1905~1944). 호를 부르던 예전 호명법에 따르면 ‘우현(又玄)’이었다. 본래 인천 사람이었지만 보성고보를 우등으로 나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로 진학해 당시로선 유례없이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후 동 대학 미학연구실 조수로 만 3년을 근무했다. 그 후 1933년 4월 1일부로 개성부립박물관 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에 조선사람이 그것도 만 서른이 안 된 이가 부립박물관 관장을 맡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우현이 부임한 후 개성부립박물관은 조선, 아니 한국 미학의 배양처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우현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전후 한국 미술사학계를 이끈 세 기둥이라 할 최순우, 황수영, 진홍섭이 나왔고 오늘날 간송, 리움과 더불어 3대 민간미술관 중 하나인 호림미술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와 같은 명문으로도 잘 알려져 있고, 고졸 학력임에도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오른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는 개성 송도고보를 나와 미래 진로를 고민하던 때 우연히 개성부립박물관에 가서 옥색 두루마기 차림의 한 남자가 열심히 유물들을 설명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결국엔 박물관의 말단 직원이 됐다. 그 후 혜곡은 평생을 박물관에서 웃고 울며 살다가 ‘박물관이 내 무덤’이란 평소의 말대로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서 순직했다. 결국 우현과의 만남이 그를 평생 박물관인으로 살게 만든 것이리라. 역시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낸 초우(蕉雨) 황수영(黃壽永,1918~2011) 박사 또한 개성 출신으로 경복고보를 나와 도쿄제국대학으로 유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던 이다. 하지만 그는 고교시절부터 방학 때 개성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부립박물관을 찾아가 우현을 만나 조선의 미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찌 되살리고 지켜내야 할지를 계몽받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전공을 바꿔가며 평생을 우현의 제자로 살았다. 그는 1944년 우현이 세상을 뜨자 그가 남긴 유품들 중 한국 미술사와 관련된 원고 등을 한국전쟁의 와중에도, 또 환도 후 전셋집을 전전하는 가운데서도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보존했다가 우현 고유섭 전집 발간을 위해 흔쾌히 내놓아 마침내 그를 오늘 우리 앞에 다시 살아 있게 했다.

 

  # 이화여대 교수와 이대박물관장을 지낸 수묵(樹默)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선생 역시 우현의 제자다. 그 또한 개성 출신으로 개성공립상업학교와 메이지대 정경학부를 졸업한 수묵은 동갑내기인 초우 황수영과 함께 방학이 되면 우현을 따라 개성 인근의 유적답사를 하곤했다. 그런 인연으로 우현이 죽은 후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장을 맡게 됐고 그후 문화재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하며 평생을 한국 고고미술사 연구에 헌신했다. 또 개성상인 출신의 호림(湖林) 윤장섭(尹章燮, 1922~ )은 개성공립상업학교를 다니던 시절 우현의 강의를 접하고 우리 문화에 눈을 떴다. 그 후 개성공상 선배인 진홍섭은 물론 최순우, 황수영 등과 교유하며 우리 문화재 감식안에 눈뜨고 사재를 아낌없이 털어 외부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를 되사들여 국보 8점, 보물 46점 등 1만 5000여 점을 소장한 호림미술관을 일궈냈다.

 

  # 지난 주말 강릉 선교장에서는 우현 고유섭 전집(10권) 완간을 기념한 의미 있는 모임이 있었다. 전집을 펴낸 이기웅 열화당 대표는 15년 전 기획했던 고유섭 전집을 기어코 완간해 낸 소회를 대신해 이렇게 말했다. “복원된 남대문만 쳐다볼 일이 아닙니다. 우현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그것은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 것과 비견해 볼 일입니다.” 그렇다. 문화융성이 캐치 프레이즈로 그치지 않으려면 우현을 다시 봐야 마땅하다. 우현 고유섭을 다시 보는 까닭은 복고적 취미가 아니다. 거기 우리 문화의 미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문화는 점핑하는 것이 아니라 한켜 한켜 쌓이는 온축(蘊蓄)이지 않은가.

 

 

정진홍 논설위원·GIST 다산특훈교수 (중앙일보 2013년 5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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