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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문법, 자연의 스토리
글을 쓸 때는 일단 문법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문법에 잘 맞더라도 내용이 빈약하거나 앞뒤가 안 맞으면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소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저자의 생각을 전달하고자 하는 글에서는 문법보다 스토리가 핵심이다. 따라서 소설을 읽으면서 스토리에는 관심이 없고 문법이 틀리지 않았나만 따진다면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과학을 공부하는 데도 비슷한 면이 있다. 자연 법칙을 배우고 문제를 풀면서 법칙을 익히는 것은 글쓰기에서 문법을 배우고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도 중요하다.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돌아가기 때문에 그런 법칙을 잘 알아야 응용력이 생기고, 과학의 기초적인 발견이 기술로 발전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물체의 운동 법칙이나 화학결합의 원리 등 과학의 기본을 잘 알더라도 이런 법칙과 원칙이 자연이라는 큰 그림에서 어떤 의미와 위치를 가지는지 생각해 볼 기회도 없고 관심도 없다면 아쉬운 일이다. 이는 마치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문법만 따지다가 스토리에 재미를 느끼지도 못하고 넓은 문학의 세계를 놓치게 되는 것과 같다.
우리나라의 성인 중에 과학에 대해 호감이나 좋은 추억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알기에는 대부분은 과학을 따분한 암기 과목으로 기억하고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한다. 의미를 떠나서 마지못해 공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풀었으니 바로 잊어버린 것은 물론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회에 나간 후에도 스스로 과학 관련 책을 찾아 읽고 교양을 쌓는다는 것도 엄두가 안 난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과거에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등 과학의 여러 분야가 따로 발전하다 보니 과학 교육에서도 서로 간의 관계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의 주요 사건을 배우지만 그들 사이의 관련을 놓치는 격이다.
그런데 과학 교육에서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수능 개선안 중에 한국사와 함께 문과 이과 구분없이 융합 과학을 필수적으로 치르도록 하는 안이 들어있는 것이다. 현재 수능을 치르는 학생이 선택하는 과학탐구 영역의 과목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1, 2 과목으로 모두 단순 지식을 테스트하는 식으로 출제된다. 그래서 수능 준비도 스토리보다는 문법 위주의 공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11년에 도입돼 전국의 많은 고등학교에서 3년째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융합 과학은 우주의 기원부터 생명 현상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역사를 통해 자연의 문법과 아울러 웅장한 자연의 스토리를 배우게 디자인돼 있다. 마치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의 역사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돼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루게 됐는지를 이야기 식으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융합 과학이 아직은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했기 때문에 몇 년 동안은 교사 양성 및 연수, 교과서 정비 등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서 수년의 과도기를 거쳐 융합 과학이 한국사와 함께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도입된다면 학생들이 우리 자신의 역사와 아울러 우리 역사의 밑바탕이 되는 우주의 역사까지 균형 있게 공부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이루어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이처럼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된다면 우리 사회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균형 있는 이해를 갖춘 사회로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138억년 우주의 역사에서 인간의 역사 시대는 채 만 년이 못 된다. 그래도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에 잘 배워야 한다. 한편 우주의 역사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우주의 자식이고, 그래서 우주의 역사도 우리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김희준 GIST 석좌교수·화학(세계일보, 2013년 09월 0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