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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눈이오름에 올라
#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리에 가면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이란 곳이 있다. 두모악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본래는 삼달분교가 있던 자리인데 폐교된 후 교사(校舍)와 학교 터를 그대로 살려 갤러리로 만든 것이다. 비록 작고 소박했지만 뭔가 모를 혼의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김영갑이란 한 사내의 혼이었다.
# 김영갑. 그는 본래 충남 부여 사람이었다. 하지만 1982년 제주를 처음 찾은 이래 85년부터는 아예 제주에 터를 박고 살다 2005년에 세상을 떴다. 57년생이었으니 채 쉰도 되기 전에 세상하직을 한 것이었다. 그가 제주에 터 박고 살며 한 일은 오로지 사진 찍는 일이었다. 자그마치 30만 컷을 찍었다. 지금처럼 디지털카메라가 아니라 필름카메라였기에 변변한 벌이가 없던 그로서는 그만큼의 사진을 찍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가 찍은 것은 제주의 오름과 바다, 구름과 바람, 해녀와 들풀이었다. 그가 찍지 않은 것은 본래 제주에 없는 것들이다. 그는 사진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들판의 당근과 고구마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그는 누구보다도 정직하게 제주를 카메라에 담았다. 사실 그가 남긴 사진 덕분에 우리는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든 제주의 본래 모습을 아련한 추억과 아슴푸레한 전설처럼 되새겨볼 수 있는 것이리라.
# 제주에 정착한 지 15년이 되어가던 1999년에 그는 루게릭병 판정을 받았다. 점점 근육이 퇴화하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복잡한 병명을 뒤로 한 채 75㎏이던 그의 건장한 신체는 43㎏으로 줄어들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삶에서조차 내몰렸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마저 담담히 받아들인 채 이렇게 말했다. “움직일 수 없게 되니까 욕심부릴 수 없게 되니까 비로소 평화를 느낀다. 때가 되면 떠날 것이고 나머지는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철들면 죽는 게 인생, 여한 없다. 원 없이 사진 찍었고 남김 없이 치열하게 살았다.” 유언처럼 들리는 이 말을 남긴 채 2005년 5월 29일 그는 눈을 감았다. 그를 아끼던 이들은 그가 생전에 폐교 뒤뜰에 심어 놓았던 감나무 밑에 그의 남은 흔적들을 꽃비처럼 뿌렸다. 빗줄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구름 사이로 햇살이 들 무렵 그의 흔적이 배어든 뿌리에서부터 한 줄기 육성이 울려오는 듯했다. “남김 없이 치열하게 살어!”라고.
# 그가 제주에서 가장 큰 애정을 갖고 죽도록 사랑했던 곳이 있다. 다름 아닌 ‘용눈이오름’이다. 그가 찍은 사진의 정수는 바로 이 용눈이오름과의 대화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이 오름을 해질녘에 올랐다. 아득하게 펼쳐진 중산간지역의 숱한 오름들이 바람을 맞으며 석양에 물들고 있었다. 그렇다. 그가 찍은 것은 단지 제주의 자연만이 아니었다. 거기엔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힘겹게 생존하지만 그래도 이상향 이어도의 꿈을 안고 살아갔던 제주의 토박이들처럼 그 역시 근육이 풀리고 스스로를 지탱할 힘조차 망실해 가면서도 투병할 시간조차 아까워 주위의 병 고치자는 손길마저 뿌리친 채 오늘 하루가 마지막이요 전부인 것처럼 살았다. 그에게 이 석양빛에 물든 거대한 오름의 바다들은 오로지 찰나의 순간처럼 다시 오지 않을 오늘, 바로 지금일 뿐이었다. 결국 그가 카메라에 담은 것은 다시 오지 않을 바로 그 순간순간이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듯 오늘 지금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들은 다시 없는 것임을 그는 분명히 깨닫고 있었다. 이 엄정한 찰나적 시각(視覺)이야말로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분투를 가능하게 만든 삶의 동력이 아니었을까!
# 그가 남긴 사진을 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그만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아니 살아 있다. 그래서 감동이다. 그 감동은 곧 생기(生氣)의 다른 이름이다. 이 찌는 더위에 제주에서 만난 김영갑은 정말이지 한 줄기 시원한 생기의 바람이었다.
정진홍 논설위원·GIST다산특훈교수 (중앙일보 2013년 7월 27일자)